더 렛저

2018년 9월호

빅토리아 시대의 음울한 사후(死後) 초상 사진, 선명한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리스 전사들, 슈퍼 8mm 카메라로 찍은 깜박거리는 어린시절 생일파티 영상, 이 세상 모든 것을 담은 고해상도 스마트폰 영상 등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매 순간을 포착하고 붙들어 두려고 애써왔다. 그러한 기록들은 기껏해야 기념물이 될 뿐이다. 원래 시간은 부단히 흐르고, 전후 서구사회 질서의 진전과 안정을 대변했던 크고 작은 기관들이 의심을 자아내는 지금 2018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일례로, 최근 들어 세계 각지의 도서관들이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종 괴로움을 야기하고 때로는 항의운동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문을 닫게 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학교 도서관이건,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를 데려와 거추장스러운 서고들을 없애겠다고 위협하는 사자상이 지키고 있는 명성 높은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이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잠시 멈춰서 문자 언어의 긴 역사와 페더급을 향해가는 그 평탄치 않은 길에 대해 생각해보자. 1791년, 훗날 영국 총리가 된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부친인 아이작 디즈레일리는 그의 저서 문학 진사(珍事)(Curiosities of Literature)를 통해 독자들에게 텍스트의 물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태초부터 사람들은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개선을 이뤄왔다는 사실이다. 동굴 벽화와 로제타석(石)이 사라진 자리에 로마인들이 황동에 공적인 기록을 새겨 넣는 방식이 들어서는 식이다. 디즈레일리는 과거 우리가 조개껍질이나 벽돌, 도자기, 타일에 글을 쓰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그 후 로마인들은 목재와 나무 표피 사이의 얇은 껍질의 쓰임새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껍질을 가리켜 라틴어로 리베르(liber, '서고(library)'의 유래. 영어 단어 '책(book)'은 너도밤나무를 뜻하는 덴마크어 보그(bog)에서 유래했다. 언어 역시 이처럼 변형되고 서로 경쟁하며 변화한다.)라고 불렀다. 디즈레일리 이후, 목재 펄프로 만들어진 종이가 수작업으로 만들어 비쌌던 그 이전 모델 레이드지(laid paper)를 대체했다. 목재 펄프로 생산한 종이는 대부분 잘 갈라지고 산성을 띠었으며 변색이 빠르고 품질이 나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장차 문자를 통해 남길 의사소통 기록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또 어떤 글로 표현될지 짐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도 여전히 손 글씨를 배울 것인가? 아니면 타자를 치거나 단순히 명령을 할 것인가? 이모티콘은 21세기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열성적으로 부르짖는 젊은이들은 돌에 글을 새기는 방식으로 전향할 것인가? 진화와 무상은 일시적이라는 의미에서 이중 나선의 두 갈래와 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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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찬사 받아 마땅한 절충주의적 영감의 원천

방콕에서 활동하는 디제이 마프트 사이(Maft Sai)는 주로 호주와 영국에서 살았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고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가져다 준 음악은 태국식으로 변형된 소박한 컨트리 음악이다. 이산 지방 사투리로 불리는 룩퉁(luk thung, 직역하면 '들판의 아이들')과 이와 짝을 이루는 몰람(molam, '전문가의 노래' 또는 '노련한 가수')은 전원생활의 리듬과 고난을 담고 있다. 몰람은 17세기부터 태국과 라오스의 대자연 속에서 연주된 음악으로, 일종의 대나무 하모니카인 켄(khaen)이 특유의 베이스 음으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때때로 북과 핀(phin, 작은 류트)도 등장해 감미로운 사운드를 완성한다. 1970년대에 이산 지역 인근에 주둔했던 미국 군인들이 현지 뮤지션들에게 록(rock), 솔(soul), 펑크(funk) 음악을 전파했고, 당대의 몰람 노래들은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리프(riff)를 섞어 넣기도 했다. 2009년 마프트 사이는 방콕에서 매달 댄스파티 순회 공연을 개최하며 이 시대의 음악을 선보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한 그는 음반 매장을 열고 '파라다이스 방콕 몰람 인터내셔널 밴드(The Paradise Bangkok Molam International Band)'를 결성했다. 이 6인조 밴드는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바 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파라다이스 방콕 몰람 인터내셔널 밴드가 2014년에 발표한 앨범 21세기 몰람(21st Century Molam)은 빼어난 트랙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Sao Sakit Mae'를 한 번 들어보시라). 하지만 마프트 사이가 바이스(Vice)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진짜배기를 보고 싶다면 그 나라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파티에 가봐야 한다.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고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음악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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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강탈, 기억, 비탄에 대한 애수 어린 명상

나바호족 영화감독 브라이언 영은 할리우드에서 묘사되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날카롭게 논한 어느 기고문 에서 '카우보이와 인디언은 앵글로색슨 정체성의 자아(ego)와 원초아(id)이다'라고 썼다. 할리우드에서 원주민들을 그리는 방식은 서서히 변화하고는 있지만 항상 복잡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다. 크리스 에어 감독의 스모크 시그널스(Smoke Signals, 1998)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지만 그 외에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및 캐나다 원주민 출신의 재능 있는 감독들은 충분히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영은 그 예로 자카리아스 쿠눅의 아타나주아: 빠른 자(Atanarjuat: The Fast Runner, 2001), 조지나 라이트닝의 올더 댄 아메리카(Older Than America, 2008), 필름 속의 인디언(Reel Injun, 2009), 제프 바나비의 어린 악귀들을 위한 시(Rhymes for Young Ghouls, 2013), 스털린 하르요의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This May Be the Last Time, 2014) 등을 언급한다. 메코(Mekko, 2015)는 세미놀족이자 무스코지족 출신에 오클라호마에서 활동하는 하르요의 세 번째 장편 극영화로, 불완전한 구원에 관한 강렬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데오 선수 출신의 스턴트 배우인 로드 론도가 메코 역을 맡아 살인죄로 19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방황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일가친척들에게 쫓겨난 메코는 털사를 이리저리 떠돌다가 오랜 친구인 버니(왓코 롱 분)와 가까워진다. 버니는 떠돌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동체를 이끄는 '거리의 추장'으로 메코를 기꺼이 그 무리에 받아들인다. TV 시리즈 파고(Fargo)에도 출연했던 잔 매클라넌이 험악한 표정으로 주시하는 빌이라는 노숙자를 연기한다. 메코가 보기에 빌은 크리크어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마귀를 뜻하는 에스테키니(estekini) 같다. 영화는 건조하고 폭력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연출되었으며 다큐멘터리 형식의 컬러 촬영 기법에 중간중간 시적인 흑백 화면이 섞여 있다. 메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금은 수질 오염으로 인해 유령 도시가 되어버린 납 광산 마을은 기억 속 장면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무료 급식소들과 술 취한 밤들로 가득한 곳이다. 라이언 베버리지가 맡은 영화음악에는 술집에서 나오는 부족의 노래, 거리 악사가 연주하는 전통 북 소리, 구슬픈 크리크 성가 등이 있다. 하르요가 주제로 삼은 상실, 소외, 혼란 등이 극에 또렷이 제시되며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방문

옛 제국 도시의 스냅 사진에서 포착된 순간들, 스쳐 지나간 종이 자료의 전당

모로코 마라케시의 바히아 궁전(Bahia Palace)과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은 명성에 걸맞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조용하면서도 그 못지않게 짜릿한 시각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 있다. 마라케시 메디나(구 도심)의 개조된 리야드(모로코 전통 가옥)에 자리한 메종 드 라 포토그라피(La Maison de la Photographie)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이곳에 가면 이 고색창연한 도시의 근대역사를 엿볼 수 있다. 1870년부터 1950년 사이를 기록한 8천 장이 넘는 원본 사진은 베르베르족 문화의 리듬과 전통, 거리 생활의 정취를 보여준다. 제마엘프나 광장(Jemaa el-Fnaa Square) 한켠에 있는 약국 간판, 무두장이들과 아직 무두질하지 않은 짐승의 가죽들, 멋지게 장식된 우물에서 일하는 아이들 등이 그 예이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장 브장스노, 피에르 부셰, 조제프 부시라(유대인 구역에 마라케시에서 거의 최초로 사진 스튜디오를 연 인물), 펠릭스(페르낭 비동의 사진작가 활동명(nom de pellicule)), 마르슬랭 플랑드랭, 조지 워싱턴 윌슨의 작품들이 있으며, 오래된 그림엽서 컬렉션이나 하이 아틀라스(High Atlas)를 담은 다니엘 시코의 1950년대 컬러 필름 등 기타 희귀 기록물도 나란히 소장품 목록에 올라 있다. 세피아색 사진들의 색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는 옥상 테라스로 가서 향기로운 민트 차와 색의 농담을 표현한 마라케시의 현대적인 지붕들로 이루어진 멋진 경관을 즐겨보길 권한다. 그리고 박물관 입장권은 바로 버리지 않는 게 좋다. 알모하드(Almohad)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17세기의 경이로운 건축물인 무아신 모스크(Mouassine Mosque)에도 입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파리스리뷰

아카이브에서: 시간성과 책략에 대한 불안한 탐구

극작가이자 1990년에 출간된 단편집 얼음 숲(The Ice Forest)의 저자인 마이클 맥과이어는 아메리카 국경 지대, 흐릿하고 신뢰할 수 없는 기억의 영역 같은 경계공간을 글의 소재로 자주 다룬다. 한 출판물에 수록된 그의 저자 소개에 의하면, '마이클 맥과이어는 어딘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살고 있다. 그는 시간을 나눈다. 그의 개는 별다른 특징이 없고 그의 말은 죽었다'. 1976년 더 파리스 리뷰(The Paris Review)에 실린 단편소설 '마지막 말(Last Words)'은 뉴욕 시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배경으로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남다른 후회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연극조로 과장되면서도 고요한 이야기에 꼭 어울리는 무대이다. 이야기는 독백 형식으로 전달되고, 화자는 앞에 놓인 '먼지 하나 없는 조용한 진열장'으로 상징되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포착된, 어쩌면 영원히 붙들린...자연스러운 순간'을 알아차리고 기뻐한다. '뭔가 보존된 것이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Catcher in the Rye) 속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박물관 전시물들은 마음의 피난처이다. 하지만 맥과이어의 화자는 그 전시물들 뒤에 숨은 계략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배가 잔뜩 부른 포식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작은 짐승의 내장을 꺼낸다... 그 짐승(희생자)은 가죽이 벗겨지고, 작은 두개골이 부숴지고, 날개와 다리에서 근육이 뜯겨 나간다. 그런 다음 발사 나무와 철사 위에서 다시 한몸으로 꿰매 붙여진다....' 배부른 포식자는 박제사의 희생양이 되고, 화자는 자의식으로 무력해진 자신을 느끼며 거대한 진화의 흐름에 바쳐진 이 영원불변의 성지에서 그의 존재가 진정 덧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리에서 손가락을 뗀다. 그 매끈한 감촉이 싫다.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내 지문을 남긴 것이 후회된다.'

 
음식

옛날옛적 식습관의 재해석

1만 년 전 농업이 처음 시작되기 전까지 인간은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는 것만 먹었다. 치마네족, 북극의 이누잇족, 하드자족처럼 수렵채집을 하며 사는 유목민족들은 그러한 식생활 방식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들 집단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혈압과 심혈관 질환 발병률이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석기시대의 식습관을 따르는 것이 우리 몸에 더 좋다는 생각은 육류에 주력하고 과자류를 극도로 제한하는 팔레오(Paleo) 열풍으로 이어졌지만, 일부 고생물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육류 중심의 식단이 고대 식습관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십자화과 생채소를 많이 먹었으며 우리도 그런 식품의 섭취를 늘리면 좋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의 생식(Elizabeth's Gone Raw)에 가면 멋들어진 생식 요리를 만나볼 수 있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이곳은 연방 양식의 편안한 연립주택 스타일의 식당으로 매주 하루만 문을 열고 금요일 저녁 시식용 정식(prix-fixe) 메뉴를 선보인다. 덜 익은 코코넛 과육으로 만든 '골수(bone marrow)', 얇게 저민 사과와 비트 조각으로 마카다미아 콤포트를 에워싼 '라비올리', 그린 파파야와 곰보버섯 '리소토' 등이 이 식당의 창업자인 엘리자베스 페티가 내놓은 획기적인 메뉴의 예들이다. 페티는 2009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생식 전도사가 되었다. 그녀는 화학요법과 유방 절제술을 받은 동시에 자신이 먹는 음식과 식당에서 제공하는 메뉴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 식당에서 최근에 선보인 계절 메뉴로는 감로 멜론, 오이, 마늘 꽃으로 만든 찬 수프, 붉은 렌틸콩과 고추기름, 살구버섯을 곁들인 진한 파바빈(fava-bean) 케이크, 그리고 입가심으로 졸인 살구와 훈제 라벤더를 더한 백색 고구마 아이스크림이 있다.

 
독서

지구 온난화 여파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그에 대한 예리한 관점

글레브 라이고로데츠키의 희망의 군도(Archipelago of Hope)는 원주민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연대순으로 기록함으로써 인간 진화에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후 변화 문제를 다룬다. 이 책은 러다이트주의자(기술 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비가가 아니다. 오히려 땅과 그 속에 담긴 비밀들에 대한 깊고도 투철한 존중은 물론 풍부한 창의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빅토리아대학교에서 재직중인 환경운동가 라이고로데츠키는 20년 동안 세계 곳곳의 원주민 공동체들을 찾아다녔다. 희망의 군도는 그가 캐나다, 에콰도르, 핀란드, 러시아, 태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견해가 주를 이룬다. 원주민들은 지구 육지 면적의 1/5 이상을 차지하지만 대개 인구 밀도가 낮은 광활한 대지의 주요 거주민이며, 생태 환경 속의 어려움을 맞닥뜨리면서 변화에 대해 노련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키우는 동시에 때로는 직접적인 위협도 받고 있다. 일례로 시베리아의 야말 반도에서는 순록 목동들은 순록의 이동 경로를 방해하는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에 반대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순록이 그 아래로 지나갈 수 있도록 파이프라인을 높이 설치하는 방법이었다. 라이고로데츠키의 책 제목에 쓰인 '희망'이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와 실천주의, 그리고 그가 현장에서 찾아낸 실용지식을 모두 버무린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책에 소개된 원주민들은 모두 그들 자신과 그들의 고유한 영토를 지속시킬 관계망을 속속들이 인지하고 있다'고 오리온(Orion) 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생물과 무생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과거와 미래, 권리와 책임, 전통 지식과 과학 간의 상호의존이야말로 우리 지구의 생물문화적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물

다른 방식으로 보기: 전통적인 정물과 총천연색 가상현실의 만남

화가이자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한 레이철 로신은 가상현실 디스플레이인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와 캔버스 위에 그린 유화를 아우르는 작품을 만든다. 가령 작품 '정물(still lifes)'에서 로신은 사진측량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신의 침실이나 작업실 같은 내부공간들을 3D 스캔으로 캡처했다. 이렇게 스캔된 여러 부분들을 3D 게임 제작용 소프트웨어로 뒤섞으면 그렇게 만들어진 왜곡된 장면들이 유화 작업의 소재가 된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은 뒤틀리고 비현실적으로 변형되어 보이는 물리적 세계이다. 빛은 불룩하게 팽창하는 듯하고 중력은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2015년에 열린 로신의 전시회 제목으로 쓰인 '손실(lossy)'이라는 용어는 파일 크기를 줄이는 압축 알고리즘(예: JPG나 MP3 포맷)을 가리킨다. 이때 실제 디지털 영역은 보존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파일은 덜 중요한 데이터를 버리는 과정에서 품질이 희생되는 대가가 따른다. 로신의 제목은 우리의 디지털 세상과 물리적 세상이 융합되어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소실되고 저하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와 이브 탕기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로신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에는 결코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 로신이 자신만의 고유한 VR실에 구축한 공간 논리는 더없이 신선하며 영화나 사진의 경계를 넘어선다.

 
관람

역사적인 전복 행위를 기리는 생생한 공연 무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현대음악 축제인 울티마 페스티벌(Ultima Festival)의 올해 주제는 이주와 유동이다. 축제 프로그램에는 로리 앤더슨, 시카다, 탄둔, 베아트리스 페레이라, 말레네 프레이타스, 마우스 온 마스, 윌리엄 켄트리지를 비롯한 다양한 아티스트와 연주자들이 포함되었다. 축제 주최측과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슬로 시의 블랙박스 극장(Black Box Teater)이 공동으로 미트라(Mitra)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는데, 뮤지컬과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단히 혁신적인 특수 효과를 접목시킨 놀라운 복합 퍼포먼스이다. 이 공연은 오스트리아 작곡가이자 비올라 다 감바 및 플루트 연주자인 에바 라이터의 음악을 배경으로, 이란 정신의학계에서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지지할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신성불가침한 최고의 치료 관행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한 테헤란 출신 정신분석가 미트라 카디바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9월 22일에 열리고 미국 소프라노 클라론 맥페이든이 출연하는 이 무대는 장르를 비틀고 뭐라 설명할 수 없이 기이한 경험을 선사하며,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해방감을 전해준다.

 

 

오드리 헬렌 웨버(Audrey Helen Weber)의 일러스트레이션

'All evolution in thought and conduct must at first appear as heresy and misconduct.'

George Bernard Shaw